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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사건사고/시론

정도전의 진법, 선수비 후공격

멋진너굴 2019. 9. 10.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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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는 성리학이 지배했던 이른바 "명분과 체면의 시대"였다. 성공적인 결과를 도출하더라도 탄핵을 당하고 때로는 역적으로 몰리기도 했다. 민족의 영웅 이순신 장군도 역적으로 몰렸고 백의종군까지 하지 않았나.

조선 건국의 성리학적 명분과 기반을 다진 사대부의 표상 정도전은 진법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 명분과 체면을 고려하면 전투는 예외 없이 "닥공"이었을터. 그러나 정도전의 진법의 핵심은 선수비 후공격이었다고 한다.

 

정도전의 강박증[임용한의 전쟁史]〈74〉

1398년(태조 7년) 정도전은 진법(陣法)을 편찬했다. 여기서 ‘선(先)수비 후(後)공격’이란 전술 개념이 등장했다. 군을 방패부대와 보병-궁수-기병 순으로 배치해 적이 쳐들어오면 방패로 진을 치고 적이 다가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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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선의 주력 부대는 궁수와 기병을 결합한 궁기병이었다고 한다. 즉, 현전력을 최적화할 수 있는 진법인 논란의 중심이었던 선수비 후공격 전술이었다. 정도전의 진법은 조선 주력 세력의 명분과 체면과 상통하지 않았다. 유연한 진법을 창안한 그였지만 현실 정치에서는 결정적인 판단착오와 유연성 부족으로 태조의 둘째 부인인 신덕왕후 소실 방석을 무리하게 세자 책봉을 밀어붙여 결국 첫째 부인 신의왕후 소실 이방원이 이끄는 세력에 비굴한 모습을 보이며 살해 당했다.

전술의 생명은 유연성이다. 적을 끌어들이고 감싼 뒤에 섬멸하는 것이 최고의 전투 기술이다. 반도의 숙명, 대한민국은 여러 모로 세겨 들을만한 진법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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